[易說歷說] 제천금인 후예, 투후 김 일제는 김 씨 시조(3)

작성일: 2014-09-18

신제국이 멸망 (서력 23년) 당한 것은, 신라 유리왕 2 년 이였으며,
정확한 루터는 알 수 없지만, 김일제 후손들은 위험한 상황에 내몰리자 그 일파가 한반도로 망명해 신라와 가야에서 왕권을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서력 42년, 김해에 먼저 도착한 김수로와 그 일족들은 6 가야를 접수하고, 새로운 김 씨 왕조를 연다.
그리고 김 일제의 원손(遠孫)인 김알지가 계림에 나타날 때까지 삼국에서는 김 씨라는 성은 없었으며, 유리왕이 6부 부장들에게 사성(賜姓:임금이 성을 내려줌.李 崔 孫 鄭 裵 雪)할 때도, 김 씨 성은 한반도에는 없었다. 김알지가 나타난 탈해왕 9년(서력 65)은 사성 후 33년 지난 후다. 김수로왕의 출현 당시, 6개의 황금알이 담겨 있었다고 한, 황금 궤 사건으로 인하여 더욱 더 제천금인(祭天金人)인 소호 금천 씨의 후예인 김 일제의 후예라고 확증할 수 있다.
실제로 가야지역에서 유목민족의 유물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청동제 솥인 동복은 흉노를 비롯한 유목민족들이 제사의식을 치르기 위해 말위에 실고 다니는 제기로서, 유럽의 훈족이 다스렸던 땅에서도 수많은 동복이 발견되었다. 경주고분에서 나온 금제감장보검(金製嵌裝寶劍보물635호)을 본 훈족 연구가 이 종호 박사는, 훈족의 아틸라 왕이 동로마에서 얻은 보물을 신라왕실에 선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게다가 가야 왕관과 신라 금관이 공히 봉(鳳)을 도등(휘장)으로 삼은 것은 그들의 조상인 소호 금천 씨가 봉으로 도등을 삼았기 때문이다.
1,300 년 전, 신라 문무왕의 비문(碑文)은, 투후 김 일제를 시조라고 하였고,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의 비문에서도, 똑같이 김 일제를 시조라고 했으며, 흥덕왕 비문에도 김 씨의 시조는 투후 김 일제라고 쓰여 있다. 또, 중국 서안에서 발견된 당나라 시대의 묘비명에, 김 일제가 신라 김 씨 왕가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 우리 세대에는 김알지와 김수로를 김 씨의 시조로 알고 있는데 반해, 여러 비문에서 나온 문구들이 하나같이 투후 김 일제를 김 씨의 시조라고 말하는 것으로 볼 때, 당시의 사람들 모두가 김 일제를 김 씨의 시조로 알았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 전 7엽(葉), 후 7엽(葉)을 거쳐, “시조 김 일제의 15 대손 한성 왕”이라 문무왕의 비문에 쓰여 있는데, 김 씨들 족보에서 조차 없는 한성 왕이 도대체 누구일까? 역사학자들도 처음에는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한성 왕이 곧 김알지며, 김알지를 15대 손으로 결론지었다.
여기에서 엽(葉)은 한 세대를 말한다.
해동비고「海東秘古」에서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신라 김 씨가 김 일제를 시조로 한단 말인가 하고, 고민했던 흔적이 있다.
「삼국사기」제 41열전 제1‘김유신 전’에서는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를 소호금천 씨의 후예라 하였고, 김 씨 성을 가졌다고 말한다.
‘羅人自謂小昊金天氏之後,故姓金氏’ 김유신의 (碑)에는, 소호 씨의 자손이 곧 남 가야의 시조가 된 김수로이며, 수로는 신라와 동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庾信碑赤云... 小昊之胤,則南加耶始祖首露與新羅同姓也’
흉노국의 태자 김일제의 직계 손이, 신라 김 씨의 김알지이며,
김일제의 동생, 김윤 의 후손이 김수로로서 가야의 시조다.
신라가 패망한 뒤, 한 무리의 일파가 조용히 북으로 향한다.
그 후, 김 씨의 나라가 세워지는데, 금(金)나라, 청(靑)나라이다.


-대한사랑 정연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