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곡성의 성황신이 되다

작성일: 2014-10-01

전라남도 곡성군은 경상남도 거창군과 자매결연 을 맺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웅군으로서「지방자치단체, 예산운용, 모범기관」으로 선정된 전설이 많은 곳이다.
모년 모일 왕건이 장군들과 평산에 사냥을 가는 도중 기러기 세 마리가 날아가는 광경을 보곤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서 맞힐 수 있겠는가 라고 물었다. 신승겸이 “소신이 맞히겠습니다” 몇 번째 기러기를 맞힐 까를 여쭈자, 세 번째 기러기 왼쪽날개를 맞히라고 명하셨다. 이에 신승겸이 날라 가는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맞혀서 떨어뜨렸다.
왕건이 탄복하여 세 마리 기러기가 날아가던 평산을 그의 식읍으로 하사 하곤 관향으로 삼게 하셨다. 또 기러기가 날아가던 곳 주변의 300결을 궁위전(弓位田)이라 했는데, 이는 뛰어난 활솜씨로 하사받은 땅이란 뜻이다.
신승겸은 달성군 공산동수 전투에서 왕건의 갑옷을 바꿔 입고 왕건을 탈출시키기 위해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고육지게(苦肉之計적을 속이기 위하여 자신의 괴로움을 무릅쓰고 꾸미는 계책)였다. 후백제 군은 신승겸을 왕건으로 오인하여 집중공격 하여 죽이곤 그의 목을 베었다. 왕건을 살려 냈지만 그는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임금을 대신해 목숨을 버린 신승겸의 충성심은 이후 크게 존경받았다.
고려 성종 13년(994)에 태사에 추증되고 역대임금의 신주를 모신 종묘의 태조사당에 공신으로 함께 모셔진다. 또 예종은 팔관회에서 신승겸 ⦁김락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충성에 감동받아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노래를 지어 그 넋을 기린다.
그가 태어난 곡성 목사동면 그 주변에는 그를 추모하는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그의 탄생지인 구룡리 용산재(龍山齋)는 그의 재실이며, 평산 신씨 후손들이 제향을 올리는 시조단 이다. 용산재 입구에는 그의 동상도 세워져 있고 죽곡면 삼태리 에는 젊은 시절 무술을 연마하며 자신의 애마를 매어두었다는 계마석이 있다. 그리고 오곡면 덕산리 에는 그를 기리는 덕양서원(德陽書院)이 있단다.
한편 그를 기리는 슬픈 이야기도 함께 남아 전하는데 신승겸이 공산 전투에서 목이 잘려 전사하자 그의 말이 주인의 머리(頭像)를 물고 고향으로 달려와 태안사 뒷산에서 사흘 밤낮을 울다가 굶어 죽었단다. 태안사 스님 들이 신승겸의 무덤과 말 무덤을 써선 매년3월16일 제사를 지낸다하고, 태안사 입구 죽곡면 원달리에는 그의 무용담을 기린 장절공태사신생영적비가 서있다. 전장에서 적장에게 베인 심승겸 장군의 목을 그의 애마가 물고선 고향땅 곡성에 묻히게 했다. 하찮은 짐승인 말도 그의 충절에 대한 전설이 곡성을 지키는 성황신”으로 모셔 졌단다. 유서 깊은 역사의 고장 곡성에선 장군의 성황단을 조성 장군을 성황신으로 모시어 후세에 길손이 쉬어가며 다리를 설 아프게 해달라는 소원성취를 비는 길목을 지키는 서낭단 으로 길이 전해지고 있다.
국가지위의 경중과 국력의 강약의 형세는 제후들이 합하면 강성해지고, 고립되면 미약해진다. 아무리 재주를 가진 명마도 보통 말 100마리로 번갈아 대항하면 명마는 반드시 피곤해 질 것이다. 한나라가 아무리 강해도 번갈아 천하의 나라들이 함께 공격하면 그 나라는 반드시 약해질 것이다. 강한나라가 강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나라를 들이 있기 때문이요, 강함을 잃는 것은 강하다고 자만하기 때문이다. 충신신승겸의 최후가 비유되는 고전의 일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