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독자투고>일본군 헌병 오장

작성일: 2004-11-22


광복회 울산·경남 전지부장 박성백

나는 진주사범 심상과 3기(1942년 4월10일~1946년 7월15일)를 졸업했다.
사범은 조선인 우수학생을 모집하여 일본군국주의를 주입시켜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드는 초등교원양성학교이다.그 당시 진주의 치안은 경찰이 수행했는데 마산주둔 80년대에서 헌병을 파견 이중으로 치안을 담당했다. 현 의료원 뒤쪽에 분견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책임자는 군조(軍曹)중사이고 아래에 오장(伍長)하사가 있다.
1944년 봄 3학년인 150명은 근로동원으로 진중·진농 학생과 같이 사천비행장 병영막사에 입소하여 1개월 사역을 당하였다. 그 후 동급반 학생 이강옥, 최학경이 헌병대에 연행되어 구속취조를 받게 되었다.
불온서적소지나, 유언비어로 기억되는데 1주일쯤 고생한 것으로 안다. 이강옥 군은 소학교 동반이라 걱정이 되어 면회를 갔다.헌병대 정문에서 면회요청을 하니 사범학교 학생은 "괜찮다"고 하여 되돌아 왔다.
사범학교는 일본인이 많은 관계로 잘 보아주는 형편이었다. 헌병대 정문을 나서는 나의 가슴이 서늘했던 기억은 지금도 선하다. 경찰서가 있는데도 헌병대는 군대 내부는 물론 시민생활을 단속하는 대단한 권력기관이었다.
말을 타고 다니는 헌병오장은 권총, 일본도, 완장을 낀 염라대왕이었다.
친일과거사를 규명하는데 군인은 중좌(中佐)중령 이상이라고 한다.
(30~40명정도) 장교보다 권력을 가진 헌병, 고등계형사, 검찰청 서기 등 친일행각을 반성 받아야 한다. 60년이 지난 처벌은 무의미하겠으나 기록에 남겨 후세들의 애국심, 민족정기 선양에 참고자료가 되도록 꼭 실행되어야 한다. 사범학교 3학년(17세)때의 헌병모습을 상상하니 지금도 겁이 난다.
고인이 된 동급생 박원구, 이용주도 헌병대에 잡혀가 고생을 하였고 상급생 13명도 체포되어 1개월 고생하였는데 지금도 김형태(전 삼천포교육장) 형은 그 때 고문당한 흉터를 내 보이며 60여년전의 학교 생활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동급생들이 일본선생으로부터 매일 구타당하는 모습을 정구현(시민노인대학장)씨를 통하여 상기하면서 적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