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빠이 깃데 오라이

작성일: 2015-05-07

"오라이" 란 말은 영어의 올 라이트(all is right)의 일본식 발음인줄로 안다. 좋아, 괜찮아, 알았다는 뜻이다. ‘이빠이 기데 오라이’는 턴(Turn) 할 적에 핸들 돌대 축을 끝까지 돌리라는 일제와 미군정의 잔재인 日語와 英語를 합친 한때의 조어(造語)로써 지금은 죽은말 死語인줄안다. 1960년대에 북상면엔 대한금속여객의 구식 곰 버스 한 대가 늘 미어터지게 손님을 실어 날랐다. 세월 따라 타 여객회사의 여러 마을 노선에 신형버스가 들어오자 전체 운행 회수가 늘어나면서 고물차론 경쟁에 밀리어 떠난 추억의 버스에 얽힌 이야기다.
차문을 채 닫기도 전에 손님을 더 태우기 위해 차 안으로 힘 것 떠밀다 못해 욱여넣다 시피 했었다. 女차장이 “오라이” 하며 버스 앞문 옆모서리를 주먹으로 쾅쾅 치는 것이 출발 신호였다. 곰 차 한 대로 종일 수차 왕복하여 고단한 몸의 화풀이로 쾅쾅 차나마 패 대야 식성이 풀리지 않았을까싶다. 낮고 천한직업이라 무시당하기 십상인 버스차장의 애환을 푸는 방법이랄까 고작 주먹으로 차나 두들긴다면 얼마나 측은한가!
기억컨대 고물차라 툭하면 펑크가 나고 기관고장이 잦아 운전수 여차장 조수와 승무 4명 1개조가 차를 관리해야만 할 처지인 것 같았다. 현금을 만지는 차장은 항상 ‘삥땅’친다는 누명쓰기가 십상이었다. 그 중 승무는 차주의아들이나 동생인 친인척들이 더부살이를 하던 시절이었다.
콩나물시루같이 승객을 포개다 시피 해 짐짝 취급을 해도 40리길 거창 시장을 볼 여고 오뉴월 땡볕에 지고이고 먼 길을 걷다가 배가 고프면 또랑에 머리박고 배 터져라 물배를 채우는 보행 길이든 터라 불평한마디 못하는 착하디착한 사람들이었다. 승무는 요즘서울지하철에서 러시아워에 승객 밀이 ‘푸시맨’ 에다가 삥땅 감시역이 기도 했다.
인권의 사각지대였던 시대 왜정(倭政)치하에 핍박받던 노예근성이 이랄까 참는 덴 이골이 난 民草들이었다.
서울에선 여차장들을 골방에서 홀딱 벗겨놓고 부끄러운 곳 까지 몸수색을 하니 한때 자살이 잇달아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見物生心이라고 슬쩍 슬쩍 돈을 챙기는 것을 눈감아주곤 반타작을 한다든지하는 좀도둑질인 부정이 싹트기마련이었고, 승무원은 바늘과 실처럼 붙어 다니니 님 도 보고 뽕도 따는 섬싱(Something)도 있어 보였다.
일터와 일감이 절대 부족하던 그 시절 못 배운 여식아 들이 갈 곳은 공장 아니면 버스차장이 고작이었다.
인간이하의 처우에도 억척같이 벌어선 동생들 공부도 시키고 전답을 장만 부모에게 효도를 하기도 했다. 또순이 기질 로 벌어선 시집 장가도간 예전친구들이 초년고생을 해선지 명이 짧아선지 불행하게도 다 세상을 떠났다.
이웃집이 서울에 돈 벌로 가선 신랑은 버스기사를, 아지매는 안내양기숙사 사감을 하면서 알몸수색 일명‘센타’를 했다지만 사람 할 짓이 못된 다고 고충을 털어 놓기도 했다.
난 고등학생 때 공차를 안 태워주면 조수와 승무를 괴롭혀 여하한일이 있어도 돈 주곤 차 탄일이 거의 없었다.
조출차간 검표 일을 보던 어르신을 만나 과거사를 말하며 사과드린즉 “야, 이 사람아 자네가 설치던 그 시절이 내겐 황금기인기라!” 며 박장대소를 했다. “이빠이기떼 오라이”를 외치던 그 시절이 만양 그립다.



-붓가는대로 임부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