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思母曲(추석날 어머님따뜻했던 정이그립습니다)

작성일: 2015-09-23

불초소생은 몸서리치는 왜정치하 1940년1월10일 북풍설한에 9남매 季子로 태어났으니 젖이 없어 묽은 미음죽에 꿀아제비를 넣어 먹였으니 피골상련하여 곧 죽을거라고 아부지는 새우젓단지를 구해두었더란다. 행님이 시집간 누나집에 날 업고가선 찔끔 젖을 얻어먹이고 오면 나쁘서 귀가길 내내울어 행님도 측은지심에 같이 울면서 눈길을 게다끌며 왔더란다. 내위 누나는 헐벗고 설먹어 폐렴에 4살때 죽었다하고 나는 天命으로 살아났다지만 춘하추동 아파 병불이신(病不離身)하니 엄마는 나 때문에 만고생을 다 하셨단다. 초등학교 1학년 땐 볼을 차다가 동무들께 차여서 그만 빼빼다리가 절골이 되어서 친구들이 업고오니 어머니는 대경실색 하여 퍼뜩 날 업곤 접골원엘 갔었더니 돌팔이놈이 “아이구 다리를 끊어야 겠네요”하더란다. 엄마는 청천병력같은 말에 혼비백산하여 “내자식이 병이들어 죽어도 다리를 붙여서 땅에 묻지”하며 울면서 업고와선 친인척등 백방으로 물어서 얻은 처방이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와 다리에 기부스를 하고 절골엔 콩죽에 멸치를 넣어 끓여서 장복을 시켜 보라”하여 어른들 말씀대로 해보니 참 한달쯤 지나니 일어서더란다.
어린애 뼈는 엿같이 아교질이라 잘 붙는데 그땐 우리 민족이 참 무지했었지 국민학교 4년때 6.25사변이 나서 폭격기서 폭탄이 떨어지면 지축이 흔들 하였고 수천개의 시뻘건 파편이 초가지붕위에 떨어지면 동네가 불바다가 되었으며 야산이나 강물엔 죽은 시체들로 尸山血海를 이루었으며 길가엔 부상자들 신음소리가 천지를 진동케 했으니 수라의 장이 따로 없었다. 동리사람들 의논이 첩첩산중 연수사로 피난을 가자고하여 행님은 보리쌀 10되 나는 감자 한자루, 오매는 옷, 이불등을 이곤 야반도주 하듯 한밤중에 나서니 똑 거지떼들 남부여대(男負女戴)꼴 같았다. 험산을 타고 강을 건너 연수사절에 오니 피난민들이 人山人海여서 幕天席地라 하늘을 지붕삼고 땅을 자리삼아서 우리는 처마 밑에 요를 깔곤 자고나면 쥐들이며 어떤 날은 뱀도 기어나와 기겁을 했었다. 혈맹 미군들 덕에 수복이 되었지만 난리통에 백성들 생활은 비참 했었다. 장터걸이나 다리밑엔 거지떼들, 문둥이들이 우글부글했었다. 어렵사리 초중고를 마치곤 1년간은 땔나무를 하다 주경야독, 청경우독하며 수불석권(手不釋卷)하니 釜大영문학과에 당당히 합격을 했었지만 학비가 없어 쩔쩔맬 저음 부산 사촌 형댁 이웃에 있는 英國국교 성공회를 다니면서 Cobbett 호주신부님께 설교통역도 해주고 英國여의사 Dr. Adams집에 한글가정교사도 하여 등록금을 족히 얻어 쓸수가 있었다. 4년간 형설지공 끝에 졸업을 하니 두분께서 부산 하야리야 美軍부대 통역직을 마련했었지만 사양을 하곤 까마귀 자조(慈鳥)처럼 노령어머님 은혜 오매불망 하여 수구초심, 월조소남지(越鳥巢南枝)요, 호마의북풍(胡馬依北風)이라 상재지향(桑梓之鄕)거창으로 와 선생秩로 삼부지양(三釜之養) 박봉에도 혼정신성(昏定晨省)동온하정(冬溫夏정)호호백말 어머님 보살피며 부산서 시부모 모실 Ruth같은 효부만나 물 떠놓고 작수성례 (酌水成禮)하였어도 득남을 하여 자식들이 다 의료인이 되었으니 이는 인간도리 孝行三道라고 양(養),상(喪),제(祭)를 지성 끝 다함에 조상의 음덕을 받음이라 고로 先塋下 산 비들기 날고 投林宿鳥들 웅창자화 속삭이는 松竹간 움막짓고“콩아옵줄 심어”惡衣惡食해도 호연지기 마음 비워 사니 나는 행복하네, 간간이 세상과 소통코져 대은시중(大隱市中)이라 市內를 나오면서 뒷동산 부모님 산소 찾아 出必告(곡)하고 조출모귀(朝出慕歸)해서도 反必面하여 시공을 초월 혼승백강(魂昇魄降)하신 어머님 만나 뵈니 나 항상 기쁘네!


-논설주간 신중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