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孔子의 허구
작성일: 2016-02-25
칠십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사회현상이 급변하긴 했지만 요즘젊은이들이 어른을 무시하긴 예사이고 작금 중학생들이 교사에게 수시로 난폭한 언어행동을 보여 타교로 전학이란 벌칙을 내렸다. 고로 학부모님 반발은 물론 법에서도 불법이라고 선고를 내렸으니 그 귀추가 주목된다. 춘추시대 사상가 孔子를 신봉하는 유교사상도 퇴색한지라 막연히“孔夫子”생각을 하던 차에 소락당 벗들이 지금 그 학생뿐만 아니라 땅에 떨어진 예절에 대하여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란 주제로 칼럼을 써보라는 권유에 뭔가 타당성을 찾다가 1999년 5월에 발행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보았다. 저자는 10세부터 타이완에서 한자와 붓글씨를 배운 “갑골문자를 연구 박사학위를 받은 중어중문학과 교수임에 이자가 쥐약을 먹고 물을 안마셨나? 무슨 개수작을 하나 싶어 정독을 해봤다. 책장을 몇 장 넘기지 않아 해머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저는 조부 게서 안의 향교 전교를 지낸 오리지널 유교 집안서 자랐다. 헌데 무엇인가 찜찜한 데가 있어서 향교에 발을 들이지 않았었는데, 이제야 그 답을 찾게 된 것 같다.
폭군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린 것 과 같은 맥락 이라 할까?
유교의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바로 공자님의 교훈이다. 공자의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과거의 무결점주의’ ‘조상숭배’ ‘수직윤리’ ‘仁果 義’ 따위는 춘추전국시대 현실정치와 괴리가 있음을 공자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저자 김경일은 우리사회의 병폐의 원인을 유교에서 찾았고, 그 중에서도 주자학을 주범으로 지목했다. 골 때리는 조선시대 수많은 당쟁들은 차치하고서라도 한국은 100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한일합방, 6. 25동란, IMF라는 국가적 파란을 세 번이나 겪었다. 거의 민족과 국가가 사라져버릴 지경의 붕괴의위가 50년이 멀다하고 반복 순환적으로 들이닥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이유는 뭘까? 50년을 주기로 소신 없는 위정자가 나타나서 일까? 아니다 바로 유교문화 속에 내제되어있는 자체적 모순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한일합방은 여간 황당한 사건이 아니었다. 만일 당시 사대부들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이란 유교경전을 잠시 접고 격동하는 국제 정세에 조금만 눈을 돌렸더라면 세상에 총 한방 쏘질 않고 나라를 내어주는 해프닝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민족은 하나’ 라는 민족주의와 전체의 미래보다는 권력 장악이 급선무였던 현실주의자들의 충돌, 이어 벌어지는 이승만의 김구밀어내기, 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친일파의 대거 등용은 새로운 정부가 깨끗한 출발을 할 수 없었던 명백한 증거이자 선언은 사회전반의 도덕적 해이를 낳았다.
1966년 중국의 마오쩌뚱에 의해 10년 大 文化革命이 유교를 공격해선 서구식 용광로에 녹아버린 중국을 보곤 세계가 발칵 뒤집어 졌었다. 천안문 사태가 바로 “공자를 버린 사건”임에 중국인들의 儒敎에 대한 피해의식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알만하다. 거기 그 광장에서 양팔을 벌려 탱크를 가로막은 용감무쌍한 그 청년학생을 기억하는 가? 나는 그 학생에게서 “잠자는 사자 중국”을 보았고, 뿐만 아니라 일본역시 265년간의 쇄국정책을 풀고, 철저한 서구화만이 강대국대열에서는 길이라고 본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기초가 된 ‘탈 아시아 론’ 을 주창主唱, 유교에 대한 감정은 ‘대단히 증오에 찬’ ‘공자 죽이기’ 발판을 딛고서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면 나의 과언일까? 이제 “공자의 허구”를 뛰어넘어 새 시대의 모럴moral 을 따라감이 옳지 않을까.
- 붓 가는대로 r2005@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