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글짓기

작성일: 2016-04-14

거창 중앙신문 창간 열세 돌을 맞았으니 흔히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구어도 있거늘 내 인생 후반기엔 『林扶陸의 붓 가는대』로 란 글 “나부랭이나 짓는 삶”이 전부인 것 같다. 내게 글쓰기란 파란곡절 한 체험담에다가 교양서적에서 감명을 받았거나, 살아가는데 유용有用타싶은 글귀를 나열할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가능한 쉽게 써선 공감 할 수 있는 글을 지으려고 애를 쓴다. 우선 글을 잘 쓰자면 타인의 글을 많이 읽어서 자기 글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공감하게 다독하는 방법이 제일 좋다고 여긴다.
여기서 염두念頭해야 할 일은 “독서에서 얻은 남의 생각은 먹다 남은 음식이나 남이 입다버린 옷에 불과하다”는 것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생각과 책에서 읽은 남의 생각의 관계는 초봄에 들판에서 피어나는 꽃과 고대의 화석 속에 들어있는 식물의 관계와 같다” 는 폐부肺腑를 찌르는 무서운 이 말을 명심할 일이다.
기명記名칼럼을 20 년간 썼으니까, 능수능란할 것이란 말은 당찮은 소리다. 평소 내 소신이랄까 인생철학을 남들이 공감共感 동감同感하기 까진 넘어야할 山이 많았고, 난감한 일도 무수히 겪어야만 했던 것 같다.
이젠 죽는 날까지 키보드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지경에 막 다다른 참에, 돌이켜 보건대, 결국 독서와의 치열한 싸움을 딛고 일어서는 방법 밖엔 별묘수가 없다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독서는 남들이 경험한 세계를 다른 사람이 간접 경험해 보는 것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기에 꿀벌이 설탕을 먹곤 포도당과 과당 성분의 꿀을 토해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杜甫의 詩 글귀다. 그래서 글을 쓰고 싶으면 책을 많이 읽어 학문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모르면 아무것도 쓸 수가 없으니까? 내게 독서는 취미가 아니고 하루의 일과인 동시에 독서는 전략이고 치열한 삶의 전장인 셈이다.
단련鍛鍊이란 말은 어떤 일을 여러 번 반복하여 숙달 하는 일로써의 단, 은 “천 번 연습하는 것이고” 련, 은 “만 번 연습 하는 것이다” 철을 두드릴 때도 천 번 두드리면 “단”이고, 만 번 두드리면 “련”이다. 이렇게 단련 없이 원래 타고난 재주만 믿고는 뜻한 바대로 좋은 글을 이뤄낼 수가 없다.
혹여 필자는 아이디어나 영감靈感이 거미줄 치듯이 뽑으면 실타래 마냥 술술 풀리려니 하겠지만 그렇진 않다. 선천적 재능과 인식(감지, 센스, 판단)의 유전적 특성의 내림이 전무하다곤 할 수 없다. 배움의 일예로 마학磨學 즉, 쇠 방아 고를 숫돌에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사상연마事上鍊磨라 뼈를 깎는 인고忍苦 없이는 좋은 글을 기대 하긴 어렵 다는 게 정석이지 싶다.
상상력사전 글이다. 태초엔 … 무無가 있었다.
태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떠한 빛도 어둠을 흩뜨리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고요를 깨뜨리지 않았다.
사방팔방 도처엔 공허만이 가득했다.
최초의 힘인 중성의 힘이 지배하던 때였다.
하지만 공허는 무엇인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때 무한 한 우주공간 한 복판에 하얀 알이 나타났다. 모든 가능성과 모든 희망을 품고 있는 우주 알이었다.
이 알에 금이 가기 시작해 폭발했다.
시간이 흘러선 입자들은 널리 퍼져 나가면서 시간의 교향곡에 맞춰 춤을 추었다.
이것이 무無에서 유有를 건지는 ‘글짓기’가 아닐까 공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 붓 가는대로 림부륙 r2005@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