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가는대로>진주가 낳은 세계적인 화가 박생광

작성일: 2005-02-21

박생광은 1904년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농업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사설 연구소와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현 교토예술대학)에서 그림 수업을 하여 화가의 길로 들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진주로 귀향 할 때까지 그는 교토와 도쿄에서 여러 미술단체의 신인미술 공모전에 거듭 입선을 하고 회원이 되면서 일본화단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배경으로 보아 당시 그의 화법은 일본화 형태의 사실적이고 장식적이며 감각적인 채색화 경향이 다분히 나타나고 있다.
진주에서의 작품활동은 1967년 서울에 새 터전을 잡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즈음 일본화법 극복과 현대적 표현작업을 시도하면서 그 해 조선일보사 현대작가 초대전 동양화부에 초대되어 서양화부의 추상화처럼 명제를 〈작품〉가·나·다로 하여 3점이나 출품한 것은 서울 진출과 화단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빛을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시기의 한 대표작은 짙은 먹과 다채색 금 은박을 병용한 순수 추상형태이면서 명제를 불교회화의 〈여의주〉로 삼고 있다. 그 현대적 시도는 필자의 집에 소장하고 있다 도난 당한 먼지를 털고 살아서 날아갈 것 같았던 그의 초기작나비 병풍과는 판이한 인도·추상화 풍의 박력있는 필치가 박생광의 후기 열정적인 새로운 한국화 추구를 예고하고 있다.
“歷史를 떠난 民族은 없다. 전통을 떠난 예술은 없다. 모-든 민족예술은 그 민족 전통 위에 있다”는 작가의 외침과 같이 역사적 토대를 딛고 엄청난 대작과 역작들을 최대한 연작하고 1984년 문예진흥원 미술관에서 마지막 대규모 개인전을 가졌다. “경탄과 찬사들이 거장예술가임을 확인시킨 전람회였다”고 이구열 한국근대비술연구소 소장은 회고하였다.
단풍이 지는 현상은 나무가 잎을 버림으로써 혹독한 겨울의 고통을 이겨내는 예지의 슬기이 듯화가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가차없이 물욕을 버리고 배고플 때 명화라는 걸작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러하듯 시야를 넓혀 온갖 이로운 예지의 지능을 계발하고 습득 발전시켜 자연과 하나되는 마음공부 즉, 감각적 직감 지, 추리지, 비교지, 성인지 四智를 터득神筆의 경지에 도달했다 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우리가 숨쉬듯이 늘 보는 눈에도 네 단계가 있어 육안, 심안, 신안, 천안으로 광명천지 24색 찬란한 아름다움 그 너머의 경지의 눈을 떠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써 참 그림의 경지에 도달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박생광은 역사의 바탕을 깔고 우리의 참 멋 『한얼』을 찾아 무속, 단청, 불교미술에 심취 무척 고뇌한 흔적을 말로, 글로, 십장생, 탱화, 조선여인의 민속적 이미지, 장승조각그림으로 우리고유의 전통의 멋을 찾고 드러내는 그런 일을 발굴하여 역사화에 주로 각고정려(刻苦精勵/몹시 애를 쓰고 정성을 들임) 했음이 그의 미완의 습작 드로잉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올해로 박생광 화백은 서거20주년, 탄신100주년이 된다. 이를 계기로 전시회가 서울, 창원, 용인, 부산, 진주에서 열렸다. 우리미술계의 한 장을 차지하는 대가를 기리는 빛나는 자리는 참으로 소중한 자리가 아닐 수 없다. 박 화백과 동 연배인 선친이 조부에게 보낸 서신에 박 화백 그림 한 점을 구해달라는 내용이 있어 진주가 낳은 세계적 박 화백의 유작 전을 보는 감회 또한 남다르다. ♧ r2005@hanmail.net